디어가 그리는 마이크로모빌리티의 미래

디어가 그리는 마이크로모빌리티의 미래

시작하며

안녕하세요, 저는 모빌리티 서비스 ‘디어’를 운영 중인 디어코퍼레이션 창업자 팽동은입니다.

이 글을 통해 디어를 시작한 계기와, 디어가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마이크로모빌리티의 거대한 사회적, 경제적 함의를 독자분들께 소개함으로써 저희 팀이 열망하는 미래상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창업 계기

제가 마이크로모빌리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8년이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미국의 Bird, Lime 같은 업체들의 빠른 성장세를 알게 되었고, 전기자전거와 전동킥보드 같은 이동 수단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두 회사를 보자마자 ‘마이크로모빌리티가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돌이켜보니 이는 어린 시절부터 제 무의식에 있던 “걷기 싫다”라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인식은 다시 저의 개인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저는 걸음걸이가 이상해서인지 조금만 걸어도 발바닥이 아픈데, 이 때문에 여행지에서도 오래 걸어 다니지 못하고, 쇼핑몰을 구경하는 것도 길어야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합니다. 회사원 시절에도 정장에 딱딱한 구두 대신 구두 모양의 운동화를 신어야 했을 정도로 발이 아팠습니다.

마이크로모빌리티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방문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면적이 너무 커서 다음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 빠르게 걸어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시절 ‘오토바이에 트레일러를 달아 학생들을 옮겨주는’ 사업을 잠시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 경영 컨설턴트로 일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출근이 이뤄졌습니다. 우선 자취방에서 신림역까지 15분을 걸어간 후, 사당에서 명동역으로 갈아타고, 다시 명동역에서 회사까지 3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이 출퇴근길이 너무 힘들어 자취방을 내버려 두고 회사 옆 고시원을 하나 더 구했습니다.

다음 직장은 역삼역에 있는 금융 회사였는데, 저는 월급이 오르자마자 회사에서 7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로 자취방을 옮겼습니다.

마이크로모빌리티 산업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걷거나 뛰기 싫은 상황에서 마땅한 대안이 없었습니다. 버스는 한참 기다려야 하고, 지하철은 골목 안쪽까지 들어가 주지 않고, 택시는 너무 비쌌습니다. 개인용으로 이동 장비를 구비하더라도, 중간에 지하철을 타야 하는 경우에는 들고 타기가 번거로워 이용하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제가 유난히 걷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저는 이런 문제가 보편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은 걷거나 뛰기 싫은 순간을 맞닥뜨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이크로모빌리티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이것이 세상을 바꾸겠구나, 우리나라에 이런 게 생기면 전 국민이 쓰는 서비스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금융 회사에서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업무를 하며 억 단위의 연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로모빌리티 산업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이 든 이상, 그 과정에 직접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한 달 만에 법인을 설립하고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반년 후 ‘디어’를 출시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제게는 이 세상에서 마이크로모빌리티가 해야 할 역할이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디어의 비전

디어를 준비할 때, 제가 가졌던 마음가짐을 6장짜리 글로 정리해서 공동 창업자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그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의 비전: 사람들이 A에서 B로 이동하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리의 철학: 고객에게만 철저히 집착하고 그 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 비전과 철학은 지금도 거의 똑같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디어의 현재 비전은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하고 즐거운 이동을 언제나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편하다는 것은 편리함만을 의미하기보단 편안함, 손쉬움도 의미합니다. 또한 즐겁다는 것은 재밌다는 것과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불쾌함 없이, 좋은 경험으로 기억되는 이동을 즐거운 이동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서비스 출시 이후 3년 반 정도 지난 지금, 비전은 아직도 한참 멀게 느껴집니다. 처음에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 즉 고객이 걷거나 뛰기 싫은 상황에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시야가 흐려지면서 집중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서비스가 출시되자 첫날부터 수많은 사람이 서비스로 몰려들었고, 디어의 매출과 규모는 빠르게 성장해왔습니다. 매출액은 2년 만에 100억 원이 넘었고, 운영 규모는 800배나 커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매출과 규모의 성장이 시야를 흐리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잘 정의했는지와 정의한 문제를 잘 해결했는지입니다. 그런데 불완전한 해결책만 제시해도 매출이 빠른 속도로 늘다 보니, 원래 정의했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디어의 현주소

결과적으로 디어를 비롯해 국내 마이크로모빌리티 산업 전체가 고객들에게 안전하지도, 편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서비스로 인식되고, 그것이 다시 작년 여름 규제 신설 도입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규제가 사회의 면역 반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몸의 한 세포가 감염이 되고 증식하기 시작하면 면역계가 염증을 일으키는 것처럼, 위험을 내포한 서비스가 너무 빠르게 성장하자 사회가 그것을 늦추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사회적 시선이 갈수록 나빠지자, 상당수의 고객은 걷거나 뛰기 싫은 순간에조차 마이크로모빌리티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매출은 헤비 유저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늘어 월 매출이 10억 원을 돌파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신호 속에서, 2022년 한 해 동안 저는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골몰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매니아층은 늘었지만 그것이 비매니아층을 괴롭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디어가 바꾸려고 했던 것은 매니아층의 생활 패턴이 아니라 사회 전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디어는 기기 추가 발주를 중단하고, 매출이나 규모보다는 원래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사업 목표를 전환했습니다.

지금 디어는 비전으로 돌아가, 원점에 서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안전하고, 편하고, 즐거운 이동을 원할 때 언제든, 어디서든 할 수 있게 할까? 이 질문이 잘 해소되어야, 고객이 걷거나 뛰기 싫은 상황에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고, 그 후에야 사회 전반으로부터 인정받는 이동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마이크로모빌리티 서비스의 침투율은 5% 수준입니다. 디어는 이 5%를 6%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머지 95%를 고객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기로 한 것입니다.

단기 계획

단기적으로 보면 우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속도를 낮추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산업 평균 시속은 23km/h이고, 법정 최고 속도는 25km/h입니다. 그러나 20km/h가 넘는 속도는 급정거, 장애물 회피, 충돌 등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너무 위험한 속도입니다. 한강 자전거 도로의 초보 따릉이족이 달리는 속도가 평균 16.3km/h라고 합니다. 어린이 자전거는 15.5km/h입니다.

디어는 18km/h 수준이면 걷거나 뛰기 싫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답답함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안전한 속도라고 보았습니다. 오는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최대 속도를 18km/h까지 낮출 예정입니다.

기존 이용자 중 일부는 낮아진 속도에 불만을 표시할 수 있겠지만, 디어팀은 아직 마이크로모빌리티를 이용하지 않는 더 큰 수요 집단을 포함한 전체 고객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외에도 회원 승인 절차를 강화하고, 안전한 하드웨어를 직접 개발하고, 개인 출퇴근/통학 전용 공유 서비스를 출시하고, 음주 여부를 측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로써 마이크로모빌리티의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미래상

길게 보면, 마이크로모빌리티는 언젠가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단점에 비해 이점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모빌리티가 단거리 이동의 표준이 된다는 것은 거대한 사회적, 경제적 함의를 가집니다.

서울시 택시 요금이 2023년부터 3,800원에서 4,800원으로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택시 이용 건수의 60%가 5km 이하의 단거리 이동입니다. 건수로 따지면 연간 1억 6천만 건이 넘습니다. 이때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 택시 요금, 그리고 빈 택시가 손님을 데리러 오는 데 사용되는 연료와 시간, 도로 교통량을 모두 고려했을 때, 마이크로모빌리티의 경제적, 환경적 효율이 택시보다 훨씬 높습니다.

택시뿐만이 아닙니다. 대중교통의 시작과 끝에 마이크로모빌리티가 위치한다면, 개인용 승용차에 대한 수요가 일정 부분 감소할 것이고, 이는 도로 위의 자동차뿐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의 숫자도 줄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동차의 환경 문제를 ‘연료 효율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진짜 문제는 연료 효율이 아니라 생산 그 자체입니다. 즉 전 세계 15억 대의 자동차가 모두 전기차로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나아지는 게 아니라, 자동차의 수 자체가 줄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로 위를 돌아다니는 자동차의 86%가 나 홀로 차량 이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시간조차 전체의 5%밖에 안 됩니다. 즉 개인용 승용차는 95%의 시간 동안 주차장에서 유휴 상태로 대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필요 이상으로 크기가 큰 자동차들이 도로와 주차장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용되는 땅들이 모두 녹지 또는 주거지로 바뀌면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질까요?

게다가 자동차는 기후위기의 단일 원인으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온실가스 배출량 통계에서, 총 29개 산업 중 도로 교통이 단독으로 11.9%를 차지해 모든 산업 중 1위입니다. 게다가 이 통계에서 제조업으로 분류된 강철 및 기타 제조업(합계 17.8%) 중 약 20%가 자동차 제조업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도로 위의 자동차를 줄이고, 자동차 생산량도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대중교통과 마이크로모빌리티를 잘 연결하는 것(MaaS)입니다. 달리 말해 마이크로모빌리티가 기후위기를 막는 데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이크로모빌리티가 모빌리티 산업 전반, 나아가 지구 차원에서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해결하는 문제가 매우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걷거나 뛰기 싫은 상황은 말 그대로 모두가 겪는 문제입니다.

마치며

디어팀은 이렇게 큰 문제를 가장 똑똑하게 해결해보자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저희 팀은 어려운 문제일수록 흥미를 느끼고, 오래 걸리는 문제일수록 길게 보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디어팀이 이 글에 쓰인 미래를 만들 수 있을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인될 것입니다. 저희는 처음의 비전을 잊지 않고 오랜 시간 인내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